2018 세계선교부장 실무자 대회 특강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UBF 선교운동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요절/사도행전 2: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셨나요? 우리 UBF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을 맡은 핵심요원들이 누굴까요? , 세계선교 부장, 실무자, 재정부장, 실무자, 곧 여러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UBF는 선교공동체로 부름 받은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인물(VVIP)들이요, 우리 공동체의 핵심요원이라는 신분인식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해보세요. “VVIP, 이렇게 만나게 돼 영광입니다!”

 

오늘 제가 명받은 특강의 제목이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UBF의 선교운동입니다. 모라비안 선교운동은 예수님의 선교명령을 붙들고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무명의 성도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초대교회의 선교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UBF의 선교운동의 모델이 모라비안 선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라비안 선교운동을 다시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 새롭게 공부를 했고,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집중된 기도요, 둘째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 열정이요, 셋째는 자비량 선교입니다.

 

첫째, 기도로 시작되어 기도로 불붙은 선교운동

1457년에 보헤미아의 쿤발트에서 모라비안 선교회의 전신인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는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이들은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었습니다. 중세 교권주의 시대에 교황이나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경을 절대권위로 믿고 순종하며,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던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교회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1722, 형제단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베르셀스도르프로 들어와 큰 공동체로 발전했는데, 그들이모라비아파로 불려 졌습니다. 그들은 베르셀스도르프를 주님이 보호하시는 곳이란 뜻의 헤른 후트’(Hernhut)로 불렀고, 헤른 후트는 이후 2세기에 걸쳐 세계선교 본부센터의 역할을 했습니다. 1727813, 성찬예배에서 참석자들은 큰 영적 부흥을 체험했는데, 이때부터 철야기도가 시작됐습니다. 선교역사학자 루스터커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기도는 일주일 내내 24시간 계속됐으며(아마도 그 특정 한 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이 기도의 전통은 100년이 넘도록 중단 없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록을 통해서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기도의 헌신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기도운동이 시작된 지 5년 후인 1732년부터 하나님은 모라비안 선교회에 선교의 문을 열어주셨고,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 전 세계 6대륙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케 하셨습니다. 동시에 이들을 통해서 잠자던 개신교의 선교를 깨우셨습니다. 어떤 가문에서는 5대에 걸쳐 선교사가 나오기도 했고, 인구 600명 정도밖에 안 되었던 헤른 후트에서 선교사 파송이 시작된 지 10년 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에 개척 선교사들이 파송됐습니다.

 

UBF의 선교역사는 1969, 당시 서독에 돈 벌러 가는 세 명의 간호사들을 안수하여 파송함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는 UBF 초기 개척자들이 예수님의 세계선교 지상명령을 영접한 후 무릎 꿇고 기도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여호수아 목자님의 기록에 의하면, UBF 광주의 개척초기 조상들은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지도하에 소기도회를 모여 기도를 시작하면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고 새벽 4시까지 둘러앉아 합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1971년도에 스탭 목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불광동 팀 수양관에서 3개월마다 스탭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스무 명이 안 되는 목자들이 저녁마다 모여 합심기도를 했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기도제목들을 흑판에 가득 적어놓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기도를 했는데, 대개 한 사람이 거의 한 시간씩 기도를 해서 기도가 끝날 때는 다음 날 아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독에 파송된 간호사 선교사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거기다가 후진국의 꽃다운 처녀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노동의 어려움까지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병원이나 양노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힘든 일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 방에 모여 성경을 읽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기숙사방 합심기도는 언제나 한나의 기도처럼 눈물의 기도가 됐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명감을 갖고 독일어를 공부했고, 믿음으로 캠퍼스에 나아가 독일 대학생들에게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서독의 자비량 선교역사를 하나님께서는 5년 뒤인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1회 서독 UBF 수양회에 165(한국 선교사 40명 포함)이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독일 캠퍼스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역사로 축복하셨습니다.

 

1971년 이후에는 미국에 이민의 문이 열려 의사, 간호사, 봉제공, 그리고 유학생들이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됐습니다. 1971년 전국연합여름수양회가 숭실대학교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하나님께서 10년 뒤인 1981년에 미국 나이아가라에서 200명이 참석하는 수양회를 열어주시도록 기도하자는 기도제목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에 세 명의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부터 전국의 모든 형제자매들은 이 기도제목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수양회를 할 때에는 백사장에 혹은 초등학교 교실바닥에 그룹 별로 꿇어 앉아 엉덩이를 치켜들고 때로는 모래를 손으로 움켜쥐고, 혹은 교실바닥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는데, 기도한 것보다 5년이나 앞당겨 1976년에 미국 학생 203명이 참석한 가운데 1회 나이아가라 UBFF 여름수양회를 이루셨습니다.

 

1985년 서울에서 제8회 세계선교 보고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향후 10년째가 되는 1995년까지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비에트연방(구 소련)에 선교의 문을 여셔서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시도록 기도하자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구 소련과는 물론 수교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련은 철의 장막이라고 하여 이곳에 선교사가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UBF 형제자매들은 이 기도제목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이 기도를 이루셨습니다. 1988년에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됐고, 올림픽 이후 동유럽 나라들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 중 맨 먼저 공산주의 깃발을 내린 헝가리 통해서 UBF 첫 선교사가 1990, 3일 비자를 갖고 구 소련의 모스크바에 들어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후 1991년에는 구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30여 명의 UBF 선교사들이 모스크바에 파송됐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해 8월에 102명의 구소련 학생들이 참석한 1UBF 소련 수양회를 빼쩨르부르크에서 열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수양회에서 주제 3, 요한복음 21장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제목으로 전하게 됐는데, 공산주의 유물론의 철의 장막 안에 가려져 있던 구소련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울려 퍼졌던 그 수양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선교 역사는 주님의 선교명령을 붙들고 절절하게 기도한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선교를 기도 선교믿음 선교라고 말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사람들의 선교운동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지도자인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근대 개신교 선교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지도자로 손꼽힙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부유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후 얼마 못되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재혼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할머니와 숙모 밑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할머니와 숙모는 마음이 따뜻하고 복음적 경건주의 신앙을 가진 훌륭한 믿음의 어미들이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자연히 할머니와 숙모의 좋은 신앙적 영향 아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숙모는 그가 열 살이 되자 할레로 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이곳에서 그는 위대한 루터교 경건주의 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영감 있는 가르침과 커다란 영적 감화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진젠도르프는 다른 열심 있는 젊은이들과 함께 겨자씨 선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적인 형제애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세계의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가 십대 시절에 이런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할레에서 공부를 마친 진젠도르프는 비텐베르크로 가서 그 당시로서는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공직자가 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보장된 장래와 출세의 가도에서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전도자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전통을 깬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지내던 중, 1719, 그러니까 열아홉 살 되던 해, 그는 유럽 일주 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방향을 바꿔놓은 한 사건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 미술 전시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를 그린 도메니코 페티의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고, 거기 새겨진 글, “내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건만 너는 무엇을 하느냐?”는 글을 보게 됐습니다. 그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나는 이 모든 고통을 다 너를 위하여 겪고 있다. 이제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은 강한 영감을 체험했습니다. 이후로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께 대한 빚을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1722년에 박해를 피해 그의 영지로 피신해온 형제단크리스천들을 영접하여 섬겼고, 모라비안의 지도자가 됐던 것입니다. 그 후 덴마크 왕 크리스챤 6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게 된 진젠도르프는 2명의 그린랜드 원주민과 서인도 제도에서 온 한 명의 흑인을 소개받았습니다. 이들은 아주 간절하게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습니다. 그 후 1년이 못되어 2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버진 제도로 파송됐고, 뒤이어 20년 동안 이들 모라비안선교회는 이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됐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선교의 지도자라일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선교의 일선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1738년 그는 3명의 선교 자원자들을 데리고 카리브해까지 가서 선교팀과 합류했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전의 사역자들은 모두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때 진젠도르프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그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매일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 선교회 조직을 개편하고 선교영역을 할당해 주기도 했습니다. 2년 후에는 미국 식민지를 방문하여 다른 선교사들과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기도 했고, 미국을 떠나기 전에 인디언들 선교를 위해 20명의 선교사들을 더 증원해 줬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피고 후원하기 위해 33년간을 해외에서 보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자주 선교여행을 했으며, 그 기간이 때로는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열정이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다!”진젠도르프를 비롯한 모라비안 선교회 회원들이 숱한 박해를 이겨내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함께 이기는 가운데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성을 갖게 됐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종의 영성이 형성됐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세계선교에 부르셨습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에서 파송된 첫 선교사는 1732년 서인도 제도로 파송된 레오나르드 더버 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빗 니치만 이라는 목수였습니다. 당시 토마스 섬이나 크르와 섬 같은 서인도 제도는 네덜란드령으로, 사탕수수나 코코아 농장을 위해 매년 1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왔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했습니다. 대농장의 주인들은 흑인들이 신자가 되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되고 또 반역을 일으킬까봐, 선교사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역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희생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1754년에는 재단사 대네, 귀트너가 남아메리카 수리남에 파송됐습니다. 이후 사업, 제빵업, 시계 제조업을 하는 동역자들이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회사를 세워 현지인들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수많은 인디언과 니그로, 그리고 노예들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린랜드에는 묘지관리인 선교사 크리스천 데이빗을 비롯해 세 명의 선교사가 파송 됐습니다. 그들이 그린랜드 행 배를 타기 위해 코펜하겐에 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무식한 평신도들이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들이 얼음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에스키모인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에 타올랐던 그들을 통한 첫 개종자는 카이아나크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전도로 온 가족이 세례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북쪽 지방의 과격한 에스키모인들이 쳐들어와 그의 처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후에 그린랜드로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항해 중에 배가 좌초되어 죽거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아 1881년까지 19명의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천 오백여명의 에스키모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 조지 슈미트에 의해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헤른 후트 본부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 만에 네덜란드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 호텐토트 지방으로 갔습니다. 당시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서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돈벌이에 방해가 됐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슈미트는 아프리카 부족들 속에서 푸줏간 일, 가죽무두질, 밀 타작을 비롯한 농장 허드렛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1742년 최초의 회심자 빌헬름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754년부터는 보어인들이 주기적으로 아프리카 토착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했고, 1882년에는 동부와 서부지역에 25개의 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례를 베풀게 됐습니다.

 

소렌손이라는 사람은 라브라도르에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된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목숨을 바쳐 선교전선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라비안 선교에 있어서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파송이 아니라 소위 자송’(自送 : 스스로 나아감)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 일례로 어떤 선교사는 사탕수수 밭에 있는 노예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몸을 노예로 팔아, 그곳에서 일하면서 선교사역을 즐거이 감당했던 무서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본받은 역사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예수님처럼 자기를 기꺼이 버릴 수 있었을까요? 또한 모라비안 선교사들 중에 오지에서 사역하다 순교한 자와 질병 때문에 순교한 자들이 허다했지만, 그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울 후속 선교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UBF의 선교사들 중에 감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거나 강제로 쫓겨난 선교사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선교의 이유로 죽임을 당한 예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모라바인의 자송(自送)의 역사를 생각할 때, UBF의 선교에 다음과 같은 예를 찾을 수 있는데, 이런 예는 많았습니다. 그 중 하나를 들면, 1980년대 초 캐나다 개척선교사 23명의 자매 선교사들은 현지 봉제공장의 봉제공들로 취업하여 들어갔습니다. 한국 인력개발원을 통해 봉제공 모집정보가 광고되었을 때, 선교의 소명을 받고 기도하고 있던 자매 목자들 100여명이 전국에서 지원을 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30명을 선발하여 옛 관악센터 지하실에 재봉틀 20대를 사놓고 3개월간 봉제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학사들이고, 석사 학위를 가진 자매도 있었습니다. 집중 봉제 훈련을 통해 봉제공 자격증을 따서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이 즈음에 어떤 분들은 닭의 목을 따는 도계공으로 지원하여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시켜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예수님의 선교명령을 받들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지에 가서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캠퍼스에 가서 학생들을 전도했습니다. 후에 그들은 자립하면서 공부하여 직업을 바꾸어 주류 사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섬기는 사역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남미에도 많은 개척선교사들이 파송됐습니다.

 

우리 UBF선교사님들은 한 분 한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한국에서 검사를 거쳐 큰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사직을 하고 선교사가 되어 현지에서 수년 동안 아파트관리인, 신문배달을 하여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현지대학을 개척했는데, 몇 차례 체류기간을 연장했으나 더 이상 연장을 할 수 없고, 본국에 돌아오면 임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들 때문에 회사에 사직을 하고 현장에 남아 사업을 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는 X국에서 사역하다가 강제추방을 당했으나 성과 이름까지 바꿔(호적변경) 새 여권을 만들어서 다시 X국에 들어가 X국 선교를 위해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오지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 중에는 안식년도 없이 거의 30년을 변함없이 충성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진국에 파송 받았든지, 후진국에 파송 받았든지, 선교사로서 충성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선교를 예수선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9641,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막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때, 저는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 붙은 광고 하나를 보게 됐습니다. “영어회화 및 성경공부 - 강사는 사라배리사라배리 선교사님이 한 번은 우리를 자기 집에 초청했는데 그 분이 살고 있는 곳은 연탄불을 때는 허름한 단간 방이었고, 살림살이는 모포 한 장과 책 몇 권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고, 이 아리따운 미국인 처녀가 한국에 와서 이런 생활을 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 그 분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진지하게 성경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요 3:16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졸업 후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하던 저를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 부르셨고, 저와 제 동역자는 스탭 목자부부로 40년을 한국에서 쓰임 받았습니다. 2011UBF 50주년 대회를 준비하면서 첫째 기도제목이 개척기 때의 복음신앙과 선교정신, 개척스피릿을 회복해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탭 모임 때마다 미개척 140나라 이름을 부르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20116월 한국대표직을 위임한지 두 달 만에 저와 안나 선교사가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실버 선교사로 자연스럽게 나아간 것은 이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제 나이 68, 제 동역자 안나 선교사는 63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우리에게는 언어, 문화, 삶의 방식과 습관, 사람들의 사고방식, 열악한 삶의 환경 등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와 평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스탭목자로서 네 번의 목장이동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비워진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사랑했고, 우리의 첫째 기도제목은 오지 아프리카에서 얼마동안이라도 오지 선교사님들의 고난에 동참하며 선교사로 쓰임 받고자 하는 소원과 예수님을 좀 더 알고 배우고자 하는 소원이 컸기 때문에 여러 어려운 상황들 가운데서도 성육신하신 예수님, 긍휼의 예수님을 배우며 즐겁고 행복한 선교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7년째가 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류비자를 막으셔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수동에 선교사님들을 위한 축령산 리트릿 홈을 사적으로 열어서 섬기는 새로운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셋째, 자비량 선교운동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자비량 선교를 했기 때문에 18세기의 세계선교의 중심 그릇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무식한 평신도가 무슨 선교를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롱과 무시를 많이 받았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전파에 열정이 있었던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직업은 다양했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의료사업이나 교육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선교기금을 모아 은행에 예금해두고 그 이자로 선교비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자비량 선교원칙을 추구했습니다. 윌리암 댕커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운동이 세운 가장 중요한 공헌은 그들이 강조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이며, 증거는 그들의 날마다의 직업을 통해서 증거 되어져야한다.’는 점에 있다.”

 

UBF 선교사들은 99.9%가 전문인 자비량 (소위 평신도) 선교사들입니다. 본국에서부터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전문직을 얻어 파송되는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도착해서 자립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식당보조, 청소, 신문배달, 점원 등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한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공통점은 자립생활과 동시에 대학에 들어가 어학을 연마하고, 또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공부를 했습니다. 현지에서 공부한 후에는 그 사회에서 전문직을 얻어 그 사회의 주류에 들어갔습니다. 직업의 종류는 교수, 컴퓨터 전문가, 개 미용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제가 UBF 선교사들의 직업을 분류해본 결과 대략 62가지 종류가 됐습니다.

 

21세기의 선교의 상황은 자비량 선교사, 그리고 실버선교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선교사의 파송 비율은 세계의 인구증가 비율을 따르지 못하고 있고, 둘째로, 목회자(성직자) 선교사의 입국을 제한하는 폐쇄지역이 증가하고 있으며, 셋째로, 종족과 문화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으며, 넷째로, 선교사의 증가에 따른 막대한 선교지원금 문제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설립된 지 이제 57년이 되니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목자들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로써 은퇴 후 연금으로 자비량(자립생활)하며 선교사로 파송 받는 실버선교가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됐습니다. 임이삭 선교사는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는데 오래 전부터 선교의 소명을 갖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장이 될 즈음에 자원하여 명예퇴직을 하고 중앙아시아 키르기즈스탄 오쉬에 실버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나아갔는데 마침 그곳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됐고, 그는 한국어과 교수로 채용됐습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그들은 러시아를 새로 공부했고, 비전이 넘치는 청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다니엘, 이미소 목자님들은 현재 남아공에서, 그리고 선교지에서 정년퇴직을 하신 정요셉, 정에스더 선교사님 부부는 우간다에서 7년을 실버선교사로 사역했고, 장모세, 장사라 선교사님들은 중미 벨리즈에서, 양다니엘, 드보라 선교사님 부부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실버선교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2001UBF 4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대회에서 주 강사였던 머더 배리 선교사님을 통해서 향후 40년이 되는 2041년까지 10만 명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들을 전 세계 233개국에 파송하도록 하자는 기도제목을 주셨습니다. UBF 선교는 자립선교의 원칙을 지키다보니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유럽이나 미주 지역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 됐고, 비교적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99개국에 파송이 됐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이 첫째로, 기도로 시작되어 기도로 불붙은 선교운동이요, 둘째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사람들의 선교운동이요, 셋째로, 자비량 선교운동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라비안 선교운동은 초대교회의 선교역사를 본받은 선교운동이었고,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의 선교모델을 본받은 선교운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예수님의 선교를 본받았던 선교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선교를 생각할 때 선교란 자기부인이요, 자기희생이요, 자기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수였다가 구원 받은 바울이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이후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평생을 자비량 선교사로서 아시아 유럽을 누비며 선교의 개척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UBF의 개척자들도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고, 문이 열리면 아무런 보장이 없는 가운데 무조건 선교지로 나아가 무슨 일이든지 하면서 자립선교를 개척했던 것입니다.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개척기 UBF 선교운동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상한 마음은 온 세상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이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세계선교는 절대 불변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희생하시는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도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나아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세계선교를 섬기도록 하심입니다. 여러분들은 선교 공동체인 우리 모임의 핵심요원 VVIP들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선교의 문만 열어주시면 언제 어디로든지 하나님께 장래를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갈 준비가 돼 있습니까? 그러리라 믿습니다. 혹시 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주역들과 UBF 선교운동의 개척자들이 그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선교명령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나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무시로 간절히 기도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때로는 다락방의 성도들처럼 집중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둘째로, 예수님과의 뜨거운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인생의 주인을 바꿔야 합니다. “(자아)”에서 주님(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주인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이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삶에서 사소한 결정을 할 때, 혹은 중요한 결절을 할 때, 주님의 뜻을 따르느냐? 아니면 자기의 경험, 습관, 감정, 유익, 욕심을 따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실제 상황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권을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자아를 죽이고 완전히 비우는 것이 근본적인 회개입니다. 이 두 가지를 결단하고 실행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선교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미개척 134개국 중 한 나라씩 점을 찍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각 센터에 돌아가 모든 동역자들이 세계선교 명령에 순종할 것을 결단하고 기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도의 불꽃들이 되십시오. 또한 직장에 다니시는 학사 목자님들은 정년퇴직을 하면 연금으로 자립하면서 오지에 나아가 개척역사를 섬기는 실버선교사들이 되도록 격려하고 도전하십시오. 여러분들부터 모든 동역자들이 예수님 사랑에 푹 빠져서 다락방의 성도들처럼, 모라비안 성도들처럼 기도한다면 오늘날 양을 얻고 제자로 키우기 어려운 캠퍼스의 모든 분위기와 상황들도 극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기부터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기초하여 세계선교방향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쳤기 때문에 본국 캠퍼스 제자양성도 열정적으로 섬길 수 있는 파워를 주셨고, 당시대의 여러 어려움들도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세상이 복잡해졌고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이 하나님의 방향과 비전을 붙들고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믿음, 단순한 믿음, 그리고 뜨거운 열정과 열렬한 기도와 하나님의 비전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일선 선교지에서 34중의 십자가를 지고 캠퍼스 제자양성의 거룩한 사명을 섬기고 계시는 우리 선교사님들이야말로 21세기의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들이요, 위대한 영웅들입니다. 전문인 자비량 사역자들은 영적 각성운동의 모판인 대학에서 길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캠퍼스 제자양성과 전문인 자비량 선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89일부터 12일까지 미국 루이스빌에서 열리는 2018 UBF 국제여름수양회(ISBC)His Kingdom이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이 수양회를 통해서 모든 참석자들이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요 구주로 새롭게 모셔 들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새롭게 불붙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선교정신과 개척 스피릿을 덧입게 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미개척 135개국에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하시고, 2041년까지 세계 233개국에 10만 명의 자비량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현지인 제자양성과 영적인 리더를 세우는 역사를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2:4) 


(2018.5.26. 이사무엘  선교사)